카테고리 없음

날이 차던날.

강 주 희 2011. 10. 2. 02:37

올 가을들어 가장 추웠던 날인 것 같다.
그날따라 바람이 굉장히 찼다.
말없이 차에 타서 앞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익숙한 홍대풍경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 익숙한 곳에서 결코 익숙하지 않을 감정을 경험하고 그것이 현실이 될것이라고 생각하니
나의 흩어진 생각들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좋을지 망설여졌다.
그러나 그날은 꼭 오늘이어야만 했다.
시작부터 마음을 정하고 나온것은 아니었지만 하루하루 쌓여온 나의 감정들은 지금 이순간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고,
오늘 입을 열어도 그것은 결코 섣부른 판단이라거나, 후회할만한 결정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 꼭 겪어야만 할 순간이었고 그것은 오늘, 잠시후라는 것이다.
내 옆에앉은 그는 다소 냉랭한 분위기였지만 내가 '그말'을 '지금'할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눈치다.
선루프 위쪽을 쳐다보는척하며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을것이다. 두번다시. 죽을때까지.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키는 찰나에 아쉬운 마음을 붙잡아두려는 예의를 갖추고 싶었으나,
이미 내 마음은, 우리의 만남은 마지막을 한참 지나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촛점이 불분명한 그의 옆모습(뒷통수를포함한 옆모습)을 향하던 나의 시선은 한치의 망설임이나 아쉬움 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차가 막힌다. 토요일 저녁이어서 그렇겠지.
이 순간을 맨정신으로, 적당한시간에, 그를 직접 만나서 이루어낼수 있다는사실이 너무나 다행이었다.
수많은 날들을 이순간을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나는 이제 정말 그와 '굿'바이를 하기위해서 모든 준비가 끝났고, 오늘 시기는 그것을 하기에 딱.적당했다.
또 이날씨다. 그와 나는 이날씨에 만나서 사랑했고, 이날씨에 헤어졌고, 또 이날씨에 또 헤어진다.
그는 찬바람 냄새를 맡으면 생각나는사람. 이'었'고. 이젠 더이상 찬바람이 나도 왠만해서는 그를 떠올리지 않겠지.
지금 이 순간에조차 나는 아쉽지 않다. 애틋한 감정들을 모두 과거로 돌려내고있다.
입을 어느 타이밍에 열까. 입이 떨어지질않는다.
겪어야할일이라는것 , 결국에 내가 말할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별을 고하는 말이 이렇게나 확신에 찼지만 반대로 망설여졌던적은 처음이다.
이제 그와 나의 인연이 정말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 다가왔고, 그것은 내가 열쇠를 쥐고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언제얘기할까.
차가 조금 더 막혔으면 좋겠다.
다시는 이 차를 타는 일이 없을것이며, 이 공기를 느끼는 일도 이젠 없을것이다.
이 생각이 마치자무섭게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부드럽게 얘기하고싶었다. 나는 화난것도, 그를 미워하는것도 , 우리의 만남이 싫은것도 아니었기에.
마지막 말을 멋있게 하고싶었다.
이제 만나지 말자라고 하기엔 부정어를 섞지 않기로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말은.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아뿔사. 말이 너무 날카롭게 나가버렸다. 내 목소리는 안그래도 상냥하지 못한 중저음인데 너무 툭.하고 던지듯 말해버렸다.
그가 대답이없다. 한참동안.
"들었어?"
"응."
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홍대,신촌을지나 집앞에 오기까지 평소보다 지루하고 긴 시간을 무거운 침묵이 관통하고있었다.
그가 항상 오던길을 실수로 헷갈렸다. 나는 길을 바로잡아주었다.
그 길을 바로잡아주지않고 우리에게 1,2분이 더 주어졌다해도 결과는 같았을것이다.
그냥 그랬었더라는 기억 하나정도 더 남았었을라나?
하나하나, 감각 하나하나 다 결국 남을거라고 생각하니 신중하지 않을수없었다.
그래도 그와 셀수도없이 많이 왔던 지나쳤던 거리지만  오늘은 특별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지나치는 거리니까.
그래도 하나하나 기념해두고싶었다. 나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머리에 담아 두어야지.
집앞에 도착하니 항상 주차공간이 많았던 길가에 어쩌면 차를 댈데가 한군데도 없다.
구석에 대충 차를 걸쳐놓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는 내게 진심이냐 물었고, 나는 진심이라 답했다.
그동안 내가 느낀 진심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고, 나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1년전의 그 일을 잠깐 떠올릴때는 약간 울컥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나는 마치 다른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덤덤했고- 담담햇다.
나는 이제 더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더이상 그가 궁금하지 않다.
이제 이런 내가 익숙하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는것을 몸소 느끼며- 난 그를 미워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증오조차 하지않는다는것을 알았다.
그에게 고맙다. 나를 버려주어 고맙고, 내가 그를 버릴수있게, 진정으로 비워낼수있게 해주어서 고맙다.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사람인지 느끼게 해주어서 고맙다
다른 사람을 만날수있는 기회를 내게 주어서 진심으로 고맙다.
다 털어놓고나서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내가 가지고있던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사뿐히 일어났다.
그와 마지막으로 악수를하고, 마지막으로 포옹을 했다.
그의 상기되어있던 얼굴은 아마 잊지 못할것같다.
뒤를 돌아 한걸음한걸음 내딛어오면서 차를 멀리 주차해두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걸음 한걸음. 한발짝 한발짝에 나는 모든것을 다 털어놓고 거짓말처럼 다 잊어내고 충만한 마음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다.
그일이 있은 이후로 지난 1년동안, 내가 집에올때 걸어온 발걸음중 가장 깃털처럼 가벼웠던 발걸음이었다.
10년묵은 체중이 내려가는 기분이란게 바로 이걸까.
나는 이제 비로소 모든것을 다 씻어내고 진정한 모습으로 태어난 것같다.
내 몫을다했고, 최선을 다했고, 진심으로 사랑했고, 깔끔하게 끝났고, 미련이 없고, 난 그 과정에서 내 감정에 거짓이 없이 솔직했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그러기에 꽤 멋있었고, 내 자신에게 떳떳하고, 행복하고, 다른사랑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